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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 키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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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케빈 키건은 1970년대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축구 선수로, '마이티 마우스'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선수 시절 리버풀, 함부르크 등에서 활약하며 수많은 우승컵을 들어올렸고, 발롱도르를 두 차례 수상했다.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으로 63경기에 출전하여 21골을 기록했다. 은퇴 후에는 뉴캐슬 유나이티드, 풀럼, 맨체스터 시티의 감독을 역임하며, 뉴캐슬과 풀럼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도 맡았으나, 유로 2000에서 조별 리그 탈락 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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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 키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조지프 케빈 키건
로마자 표기Joseph Kevin Keegan
OBEOBE
케빈 키건, 1980년 경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케빈 키건 (잉글랜드),
출생일1951년 2월 14일
출생지잉글랜드, 동커스터, 암소프
173cm
포지션공격수
별칭마이티 마우스
킹 케브
클럽 경력
유소년 클럽Enfield House YC
1967-1968: 스컨소프 유나이티드
선수 경력1968-1971: 스컨소프 유나이티드 (124경기, 18골)
1971-1977: 리버풀 (230경기, 68골)
1977-1980: 함부르거 SV (90경기, 32골)
1980-1982: 사우샘프턴 (68경기, 37골)
1982-1984: 뉴캐슬 유나이티드 (78경기, 48골)
1985: 블랙타운 시티 (2경기, 1골)
#- th: 전체 경기 및 골
#td: 592경기, 204골
국가대표 경력
청소년 국가대표1972: 잉글랜드 U23 (5경기, 1골)
국가대표1972-1982: 잉글랜드 (63경기, 21골)
감독 경력
감독1992-1997: 뉴캐슬 유나이티드
1997-1999: 풀럼
1999-2000: 잉글랜드
2001-2005: 맨체스터 시티
2008: 뉴캐슬 유나이티드

2. 선수 경력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선수. 작은 키에도 풍부한 체력으로 필드를 누비며 "'''마이티 마우스'''"라고 불렸다.

1968년 스칸소프 유나이티드에서 프로 데뷔. 3시즌을 보낸 후 1971년 리버풀로 이적[146], 1972-73 시즌 UEFA컵 결승,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와의 경기에서 1차전 2골을 기록하며 대회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144]。 1975-76 시즌, UEFA컵 결승, 클럽 브뤼헤와의 경기에서 1차전, 2차전 모두 득점을 기록하며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145]。 1976-77 시즌, 챔피언스컵 결승에서 알란 시몬센이 이끄는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3-1로 꺾고 리버풀에 클럽 역사상 첫 챔피언스컵 우승을 안기는 등[146], 수많은 타이틀 획득에 기여하며 리버풀 서포터들의 아이돌이 되었고, 리버풀에서 323경기 100골의 성적을 기록했다[145]

이후 1977년 독일의 함부르크 SV로 이적[146]。 당시 영국에서 해외로 이적하는 사례나 이적 후 성공하는 사례가 적었기 때문에 활약에 대한 우려가 있었지만, 함부르크에서도 핵심 선수로 1978-79 시즌 독일 분데스리가 제패, 다음 시즌인 1979-80 시즌, UEFA 챔피언스컵 결승 진출에 기여했다. 1980년부터 잉글랜드로 복귀, 사우샘프턴에서 뛰었고, 1982년에는 26골을 기록하는 활약으로 PF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 그 당시 2부 리그의 뉴캐슬로 이적, 1984년에 은퇴했다[146]

이러한 활약으로 1978년, 1979년 2년 연속 발롱도르 (유럽 올해의 선수)를 수상했지만, 잉글랜드 대표팀에서의 활약과는 인연이 없어, 유일한 월드컵 출전이었던 1982년 월드컵 스페인 대회에서는 부상으로 인해 1경기 출전에 그쳤다. 잉글랜드 대표팀 통산 63경기 21득점[146]

2004년 3월 펠레가 선정한 "위대한 축구 선수 100인"에 선정되었다.

==== 초기 경력 ====

케빈 키건은 1951년 2월 14일 잉글랜드 요크셔주 암소프에서 태어났다.[9] 아일랜드 이민자 출신 광부였던 아버지 조 키건과 삼촌 프랭크 키건은 뉴캐슬 유나이티드 FC의 팬이었으며, 이들의 영향으로 키건 역시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팬으로 성장했다. 그들은 휴이 갤러처재키 밀번을 가장 좋아하는 선수로 꼽았다. 키건의 할아버지 프랭크 키건은 1909년 웨스트 스탠리 탄광 참사에서 영웅적인 구조 활동을 펼친 인물이다.

키건은 캔틀리에 있는 성 베드로 고등학교에 다녔으며,[9] 크로스컨트리 달리기, 럭비, 축구 등 다양한 스포츠에 참여했고, 학교 크리켓 팀의 주장을 맡았다. 또한 전 영국 헤비급 챔피언 브루스 우드콕 (복서)이 운영하는 지역 클럽에서 권투를 하기도 했다. 15세에는 노팅엄에서 던캐스터까지 50마일 달리기를 완주하기도 했다.

소년 시절 키건은 던캐스터 로버스를 응원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알릭 제프리였는데, 지미 머피 (축구 선수)는 그를 잉글랜드의 펠레라고 묘사했고, 밀번은 "자신이 본 최고의 젊은 선수"라고 묘사했다. 학창 시절 키건은 지미 힐 감독 아래 코벤트리 시티 FC에서 시험을 치렀지만 계약을 제안받지 못했다. 던캐스터 로버스에서도 시험을 보았지만, 잘못된 정보를 얻어 시험에 참여하지 못했다.

키건은 페글러 요크셔에서 사무원으로 일하면서 아마추어 축구 선수로 활동했다. 1966년, 론스데일 호텔에서 일요일 아침 리그 축구를 하던 중 밥 넬리스라는 선수에게 스컨소프 유나이티드 FC에서 시험을 치르도록 제안받았다. 1968년 스컨소프 유나이티드에서 프로 선수로 데뷔하여, 1971년까지 3시즌 동안 124경기에 출전하여 18골을 기록했다.[1] 데뷔 시즌 이후 그는 상위 리그 클럽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스컨소프는 원정 경기에 데려갈 전임 운전사를 고용할 자금이 없었기 때문에 키건과 다른 젊은 선수들이 돌아가며 미니버스를 운전해 원정 경기를 다녔다. 1969–70 시즌에 팀은 FA컵 5라운드에 진출했고, 1부 리그 팀인 셰필드 웬즈데이를 꺾었다.

==== 리버풀 ====

1977년 FC 취리히와의 경기에서 케이건(왼쪽)이 입장하고 있다


1971년, 케이건은 리버풀의 수석 스카우트인 제프 트웬티먼의 주목을 받았다.[10][11] 빌 샹클리 감독은 케이건을 존 토샤크와 함께 공격수로 배치하기로 결정했다.[13] 케이건은 토샤크와 콤비 플레이를 펼치며 1970년대 리버풀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케이건은 토샤크를 팀 동료로 좋아했지만, 경기장 밖에서는 교류하지 않았고, 그들이 서로의 플레이 스타일을 얼마나 빨리 이해할 수 있었는지 이상하다고 말했다. 케이건은 자신과 그 수준의 축구 이해도를 가진 유일한 다른 선수는 잉글랜드 국가대표인 트레버 브루킹뿐이라고 주장했다.[13] 1971년 8월 14일, 케이건은 안필드에서 노팅엄 포레스트를 상대로 리버풀 데뷔전을 치렀고, 12분 만에 득점했다.[12]

1972-73 시즌에 케이건은 첫 번째 주요 타이틀을 획득했다. 리버풀은 리즈 유나이티드와 아스널과 1부 리그 선두 경쟁을 벌였다. 돈 레비의 리즈는 부활절 월요일에 안필드를 방문하여 결전을 벌였다. 전반 종료 직전에 리즈의 피터 로리머는 열린 골을 놓쳤다. 후반 2분 후, 피터 코맥이 득점하여 리버풀이 앞서 나갔다. 케이건은 후반 늦게 두 번째 골을 추가하여 승리를 확정했다. 리버풀은 최종 경기에서 레스터 시티와 0-0으로 비겨 타이틀을 차지했다.[14] UEFA 컵에서 리버풀은 결승전에 진출하여 독일 팀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와 맞붙었다. 안필드에서 열린 1차전은 폭우로 인해 27분 만에 중단되었고 다음 날로 연기되었다.[15] 케이건은 3-0 승리에서 두 골을 넣었다. 리버풀은 2차전에서 2-0으로 패했지만, 총 득점 3-2로 타이틀을 획득했다.[16]

1974년 결승전에서 리버풀은 뉴캐슬 유나이티드와 경기를 치렀다. 케이건은 리버풀 선수들이 뉴캐슬의 말콤 맥도날드와 존 튜더의 트래시 토크에 의해 동기 부여되었다고 설명했다.[17] 케이건은 두 골을 넣어 리버풀이 뉴캐슬을 3-0으로 이겼다.[17]

다음 해에는 케이건이 리버풀에서 12골을 기록했지만, 1974-75 시즌은 무관의 시즌이었다. 그러나 그 후 2년 동안 케이건은 수많은 영예를 안았고, 리버풀은 1975-76 시즌에 다시 리그 챔피언십과 UEFA 컵을 우승했다. 케이건은 UEFA 컵 결승전에서 클럽 브뤼헤를 상대로 두 번 모두 득점했고, 리버풀은 합계 4-3으로 승리했다.[12]

1976-77 시즌에 케이건은 리버풀이 리그 챔피언십과 유러피언 컵을 우승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클럽에서 마지막 시즌에 20골을 기록했다. 케이건이 리버풀 유니폼을 입고 홈에서 마지막으로 출전한 경기는 라이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패한 FA컵 결승전이었다.[12] 유러피언 컵 결승전은 로마에서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상대로 4일 후에 열렸다. 케이건은 득점하지 못했지만, 베르티 포크츠가 페널티 구역에서 파울을 범하게 되는 후반 늦게 돌진했다. 이것은 필 닐이 성공적으로 전환한 페널티킥으로 이어져 3-1 승리를 확정했다.[12]

케이건은 323번의 출전과 100골을 기록한 후 리버풀을 떠났다.[18] 리버풀에서의 시간에 대해 케이건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제가 두려워하는 유일한 것은 Kop 앞에서 열린 골을 놓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저는 죽을 것입니다. 그들이 'You'll Never Walk Alone'을 부르기 시작하면 제 눈에서 눈물이 납니다. 실제로 경기하는 동안 울었던 적도 있습니다."[18]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선수로, 리버풀에서 323경기 100골의 성적을 기록했다[145]

==== 함부르크 SV ====

1996년 함부르크 SV의 서포터와 함께 있는 키건


케빈 키건은 1977년 서독 분데스리가의 함부르크 SV로 이적했다.[146] 당시 영국 선수가 해외 리그로 이적하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에 키건의 이적은 큰 화제가 되었다. 이 이적은 1977년 FA컵 결승전과 유러피언컵 결승전 사이에 합의되었으며, 키건은 당시 영국 최고 이적료 기록인 50만 파운드를 기록했고, 이는 독일 이적료 기록의 거의 두 배에 달했다.[19] 키건은 리버풀에서 받았던 마지막 시즌 연봉 2만 2천 파운드보다 훨씬 많은 12만 2천 파운드를 함부르크에서 받았다.[19]

키건은 함부르크에서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선수가 되었고, 새로운 팀 동료들에게 즉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느꼈다.[19] 규칙에 따라 한 클럽은 선수단에 외국인 선수를 2명 이상 둘 수 없었는데, 키건의 이적은 3번의 유러피언컵 우승자인 호르스트 블랑켄부르크를 간접적으로 내보내는 결과를 낳았다.[20] 초창기에는 언어적 어려움도 있었다.[20]

바르셀로나와 전 소속팀 리버풀과의 프리 시즌 친선 경기에서 골을 넣었지만, 함부르크는 유러피언 슈퍼컵 결승전에서 리버풀에게 패했다. 함부르크에서의 첫 시즌은 좋지 않았지만, 1978년 ''프랑스 풋볼'' 유럽 올해의 선수 상을 받았다.[21] 1978-79 시즌에는 브랑코 제베츠 감독 아래에서 엄격한 훈련과 독일어 이해도 증가로 함부르크는 19년 만에 첫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키건은 2년 연속 발롱도르를 수상했다.[21][22]

1979년, 함부르크 서포터들은 키건에게 인기 만화 슈퍼히어로인 "마이티 마우스"라는 별명을 붙였다.[3] 1979-80 시즌, 함부르크는 유러피언컵 결승에 진출했으나 노팅엄 포레스트에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3] 분데스리가 타이틀도 바이에른 뮌헨에게 내주었다. 키건은 1980년 여름 함부르크를 떠나 사우샘프턴으로 이적했다.[3]

==== 사우샘프턴 ====

1980년 2월 11일, 사우샘프턴의 감독 로리 맥메네미는 앰필드에 있는 포터스 헤론 호텔에서 기자 회견을 열어 키건이 여름에 '세인츠'에 합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23] 이 소식은 비교적 작은 클럽이었던 사우샘프턴 시와 전 세계 축구계에 놀라움을 안겨주었다.[23] 키건은 함부르크와의 계약에 리버풀이 그를 다시 데려올 수 있는 조항이 있었지만, 리버풀은 이 조항을 행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사우스햄튼은 그를 42만 파운드에 영입했고, 키건은 1980년 7월 23일 랜스다운 로드에서 열린 샴록 로버스와의 프리시즌 친선 경기에서 사우스햄튼 데뷔전을 치렀다.

델에서의 키건의 두 시즌은 앨런 볼, 필 보이어, 믹 채넌, 찰리 조지와 함께 화려한 팀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1980–81년에 '세인츠'는 76골을 기록하며 6위를 차지했는데, 이는 당시 최고 리그 순위였다.

1981-82 시즌에 키건은 최고의 활약을 펼쳐, 26골을 기록하며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고, PFA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1982년 4월 초에 사우스햄튼은 1부 리그 순위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으나,[24] 2월 이후 3승밖에 거두지 못해 7위로 마감했으며, 1위와는 21점 차였다.[24] 축구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OBE를 수여받았다. 키건은 팀의 72골 중 26골을 기록했고, ''Southern Daily Echo''에 의해 클럽의 시즌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이 두 번째 시즌은 그의 선수 경력 중 가장 많은 골을 기록한 시즌으로, 모든 대회에서 30골을 기록하며 골든 부츠를 수상했다.

키건은 팀이 리그 선두를 달리고 있을 때 맥메네미 감독이 사우스햄튼의 수비를 강화하지 못한 것(팀은 1981–82 시즌에 67골을 실점)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25] 또한 1982년 4월 애스턴 빌라와의 3-0 패배 이후 맥메네미가 팀 전체를 속임수로 몰았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에 키건은 매우 이의를 제기했다. 키건은 '세인츠'의 다음 프리시즌 투어에 합류했지만, 이미 이적을 결심한 상태였다. 1982–83 시즌이 시작되기 며칠 전, 그는 10만 파운드의 이적료로 뉴캐슬 유나이티드와 계약했다.[27]

==== 뉴캐슬 유나이티드 ====

케빈 키건은 1982년 당시 2부 리그 소속이었던 뉴캐슬 유나이티드로 이적하여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보냈다.[146] 뉴캐슬에서 그는 팬들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얻었으며, 그의 입단을 발표하는 기자 회견은 고스포스 파크 호텔에서 열렸다. 2부 리그 팀에 두 번의 발롱도르 수상자를 영입하자, 지역 신문의 헤드라인은 "그가 왔다!"였다.

키건은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휴이 갤러처재키 밀번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뉴캐슬에서 뛰는 것을 꿈꿨고, 뉴캐슬 입단은 고향에 온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으며, 데뷔전에서 퀸즈 파크 레인저스를 상대로 첫 골을 넣은 후 군중 속으로 뛰어드는 등 팬들과 하나가 되려는 모습을 보였다.

키건은 아서 콕스 감독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며 팀의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 콕스는 키건에게 선수에 대한 의견을 묻기도 했으며, 키건은 콕스 감독의 유머 감각과 훈련 방식을 존경했다. 1983년에는 피터 비어슬리가 팀에 합류했고, 키건은 비어슬리의 뛰어난 기량에 감탄하며 그를 극찬했다.

1984년 2월 14일, 키건은 33번째 생일에 은퇴를 발표했다. 그는 리버풀과의 경기에서 자신의 속도가 예전 같지 않음을 느끼고 은퇴를 결심했으며, 1부 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연장하기 위해 자신의 플레이 스타일을 바꾸고 싶지 않았다고 밝혔다. 키건의 마지막 리그 경기는 브라이튼 & 호브 알비온과의 경기였으며, 그는 이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하며 팀의 3-1 승리를 이끌었다.[28] 뉴캐슬에서의 마지막 출전은 며칠 후 리버풀과의 친선 경기였으며, 키건은 헬리콥터를 타고 경기장을 떠났다.[28][29]

키건은 뉴캐슬에서 2시즌 동안 78경기에 출전하여 48골을 기록했으며, 팀의 1부 리그 승격에 크게 기여했다.[28] 은퇴 후에는 가족과 함께 스페인으로 이주하여 생활했다.[28]

==== 블랙타운 시티 ====

1985년 4월, 키건은 은퇴를 번복하고 호주 내셔널 사커 리그블랙타운 시티에서 게스트 선수로 두 경기를 뛰었다. 첫 경기에서 캔버라 시티에 2-3으로 패했으나 득점을 기록했다.[30]

2. 1. 초기 경력

케빈 키건은 1951년 2월 14일 잉글랜드 요크셔주 암소프에서 태어났다.[9] 아일랜드 이민자 출신 광부였던 아버지 조 키건과 삼촌 프랭크 키건은 뉴캐슬 유나이티드 FC의 팬이었으며, 이들의 영향으로 키건 역시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팬으로 성장했다. 그들은 휴이 갤러처재키 밀번을 가장 좋아하는 선수로 꼽았다. 키건의 할아버지 프랭크 키건은 1909년 웨스트 스탠리 탄광 참사에서 영웅적인 구조 활동을 펼친 인물이다.

키건은 캔틀리에 있는 성 베드로 고등학교에 다녔으며,[9] 크로스컨트리 달리기, 럭비, 축구 등 다양한 스포츠에 참여했고, 학교 크리켓 팀의 주장을 맡았다. 또한 전 영국 헤비급 챔피언 브루스 우드콕 (복서)이 운영하는 지역 클럽에서 권투를 하기도 했다. 15세에는 노팅엄에서 던캐스터까지 50마일 달리기를 완주하기도 했다.

소년 시절 키건은 던캐스터 로버스를 응원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알릭 제프리였는데, 지미 머피 (축구 선수)는 그를 잉글랜드의 펠레라고 묘사했고, 밀번은 "자신이 본 최고의 젊은 선수"라고 묘사했다. 학창 시절 키건은 지미 힐 감독 아래 코벤트리 시티 FC에서 시험을 치렀지만 계약을 제안받지 못했다. 던캐스터 로버스에서도 시험을 보았지만, 잘못된 정보를 얻어 시험에 참여하지 못했다.

키건은 페글러 요크셔에서 사무원으로 일하면서 아마추어 축구 선수로 활동했다. 1966년, 론스데일 호텔에서 일요일 아침 리그 축구를 하던 중 밥 넬리스라는 선수에게 스컨소프 유나이티드 FC에서 시험을 치르도록 제안받았다. 1968년 스컨소프 유나이티드에서 프로 선수로 데뷔하여, 1971년까지 3시즌 동안 124경기에 출전하여 18골을 기록했다.[1] 데뷔 시즌 이후 그는 상위 리그 클럽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스컨소프는 원정 경기에 데려갈 전임 운전사를 고용할 자금이 없었기 때문에 키건과 다른 젊은 선수들이 돌아가며 미니버스를 운전해 원정 경기를 다녔다. 1969–70 시즌에 팀은 FA컵 5라운드에 진출했고, 1부 리그 팀인 셰필드 웬즈데이를 꺾었다.

2. 2. 리버풀



1971년, 케이건은 리버풀의 수석 스카우트인 제프 트웬티먼의 주목을 받았다.[10][11] 빌 샹클리 감독은 케이건을 존 토샤크와 함께 공격수로 배치하기로 결정했다.[13] 케이건은 토샤크와 콤비 플레이를 펼치며 1970년대 리버풀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케이건은 토샤크를 팀 동료로 좋아했지만, 경기장 밖에서는 교류하지 않았고, 그들이 서로의 플레이 스타일을 얼마나 빨리 이해할 수 있었는지 이상하다고 말했다. 케이건은 자신과 그 수준의 축구 이해도를 가진 유일한 다른 선수는 잉글랜드 국가대표인 트레버 브루킹뿐이라고 주장했다.[13] 1971년 8월 14일, 케이건은 안필드에서 노팅엄 포레스트를 상대로 리버풀 데뷔전을 치렀고, 12분 만에 득점했다.[12]

1972-73 시즌에 케이건은 첫 번째 주요 타이틀을 획득했다. 리버풀은 리즈 유나이티드와 아스널과 1부 리그 선두 경쟁을 벌였다. 돈 레비의 리즈는 부활절 월요일에 안필드를 방문하여 결전을 벌였다. 전반 종료 직전에 리즈의 피터 로리머는 열린 골을 놓쳤다. 후반 2분 후, 피터 코맥이 득점하여 리버풀이 앞서 나갔다. 케이건은 후반 늦게 두 번째 골을 추가하여 승리를 확정했다. 리버풀은 최종 경기에서 레스터 시티와 0-0으로 비겨 타이틀을 차지했다.[14] UEFA 컵에서 리버풀은 결승전에 진출하여 독일 팀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와 맞붙었다. 안필드에서 열린 1차전은 폭우로 인해 27분 만에 중단되었고 다음 날로 연기되었다.[15] 케이건은 3-0 승리에서 두 골을 넣었다. 리버풀은 2차전에서 2-0으로 패했지만, 총 득점 3-2로 타이틀을 획득했다.[16]

1974년 결승전에서 리버풀은 뉴캐슬 유나이티드와 경기를 치렀다. 케이건은 리버풀 선수들이 뉴캐슬의 말콤 맥도날드와 존 튜더의 트래시 토크에 의해 동기 부여되었다고 설명했다.[17] 케이건은 두 골을 넣어 리버풀이 뉴캐슬을 3-0으로 이겼다.[17]

다음 해에는 케이건이 리버풀에서 12골을 기록했지만, 1974-75 시즌은 무관의 시즌이었다. 그러나 그 후 2년 동안 케이건은 수많은 영예를 안았고, 리버풀은 1975-76 시즌에 다시 리그 챔피언십과 UEFA 컵을 우승했다. 케이건은 UEFA 컵 결승전에서 클럽 브뤼헤를 상대로 두 번 모두 득점했고, 리버풀은 합계 4-3으로 승리했다.[12]

1976-77 시즌에 케이건은 리버풀이 리그 챔피언십과 유러피언 컵을 우승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클럽에서 마지막 시즌에 20골을 기록했다. 케이건이 리버풀 유니폼을 입고 홈에서 마지막으로 출전한 경기는 라이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패한 FA컵 결승전이었다.[12] 유러피언 컵 결승전은 로마에서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상대로 4일 후에 열렸다. 케이건은 득점하지 못했지만, 베르티 포크츠가 페널티 구역에서 파울을 범하게 되는 후반 늦게 돌진했다. 이것은 필 닐이 성공적으로 전환한 페널티킥으로 이어져 3-1 승리를 확정했다.[12]

케이건은 323번의 출전과 100골을 기록한 후 리버풀을 떠났다.[18] 리버풀에서의 시간에 대해 케이건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제가 두려워하는 유일한 것은 Kop 앞에서 열린 골을 놓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저는 죽을 것입니다. 그들이 'You'll Never Walk Alone'을 부르기 시작하면 제 눈에서 눈물이 납니다. 실제로 경기하는 동안 울었던 적도 있습니다."[18]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선수로, 리버풀에서 323경기 100골의 성적을 기록했다[145]

2. 3. 함부르크 SV

케빈 키건은 1977년 서독 분데스리가의 함부르크 SV로 이적했다.[146] 당시 영국 선수가 해외 리그로 이적하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에 키건의 이적은 큰 화제가 되었다. 이 이적은 1977년 FA컵 결승전과 유러피언컵 결승전 사이에 합의되었으며, 키건은 당시 영국 최고 이적료 기록인 50만 파운드를 기록했고, 이는 독일 이적료 기록의 거의 두 배에 달했다.[19] 키건은 리버풀에서 받았던 마지막 시즌 연봉 2만 2천 파운드보다 훨씬 많은 12만 2천 파운드를 함부르크에서 받았다.[19]

키건은 함부르크에서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선수가 되었고, 새로운 팀 동료들에게 즉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느꼈다.[19] 규칙에 따라 한 클럽은 선수단에 외국인 선수를 2명 이상 둘 수 없었는데, 키건의 이적은 3번의 유러피언컵 우승자인 호르스트 블랑켄부르크를 간접적으로 내보내는 결과를 낳았다.[20] 초창기에는 언어적 어려움도 있었다.[20]

바르셀로나와 전 소속팀 리버풀과의 프리 시즌 친선 경기에서 골을 넣었지만, 함부르크는 유러피언 슈퍼컵 결승전에서 리버풀에게 패했다. 함부르크에서의 첫 시즌은 좋지 않았지만, 1978년 ''프랑스 풋볼'' 유럽 올해의 선수 상을 받았다.[21] 1978-79 시즌에는 브랑코 제베츠 감독 아래에서 엄격한 훈련과 독일어 이해도 증가로 함부르크는 19년 만에 첫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키건은 2년 연속 발롱도르를 수상했다.[21][22]

1979년, 함부르크 서포터들은 키건에게 인기 만화 슈퍼히어로인 "마이티 마우스"라는 별명을 붙였다.[3] 1979-80 시즌, 함부르크는 유러피언컵 결승에 진출했으나 노팅엄 포레스트에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3] 분데스리가 타이틀도 바이에른 뮌헨에게 내주었다. 키건은 1980년 여름 함부르크를 떠나 사우샘프턴으로 이적했다.[3]

2. 4. 사우샘프턴

1980년 2월 11일, 사우샘프턴의 감독 로리 맥메네미는 앰필드에 있는 포터스 헤론 호텔에서 기자 회견을 열어 키건이 여름에 '세인츠'에 합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23] 이 소식은 비교적 작은 클럽이었던 사우샘프턴 시와 전 세계 축구계에 놀라움을 안겨주었다.[23] 키건은 함부르크와의 계약에 리버풀이 그를 다시 데려올 수 있는 조항이 있었지만, 리버풀은 이 조항을 행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사우스햄튼은 그를 42만 파운드에 영입했고, 키건은 1980년 7월 23일 랜스다운 로드에서 열린 샴록 로버스와의 프리시즌 친선 경기에서 사우스햄튼 데뷔전을 치렀다.

델에서의 키건의 두 시즌은 앨런 볼, 필 보이어, 믹 채넌, 찰리 조지와 함께 화려한 팀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1980–81년에 '세인츠'는 76골을 기록하며 6위를 차지했는데, 이는 당시 최고 리그 순위였다.

1981-82 시즌에 키건은 최고의 활약을 펼쳐, 26골을 기록하며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고, PFA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1982년 4월 초에 사우스햄튼은 1부 리그 순위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으나,[24] 2월 이후 3승밖에 거두지 못해 7위로 마감했으며, 1위와는 21점 차였다.[24] 축구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OBE를 수여받았다. 키건은 팀의 72골 중 26골을 기록했고, ''Southern Daily Echo''에 의해 클럽의 시즌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이 두 번째 시즌은 그의 선수 경력 중 가장 많은 골을 기록한 시즌으로, 모든 대회에서 30골을 기록하며 골든 부츠를 수상했다.

키건은 팀이 리그 선두를 달리고 있을 때 맥메네미 감독이 사우스햄튼의 수비를 강화하지 못한 것(팀은 1981–82 시즌에 67골을 실점)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25] 또한 1982년 4월 애스턴 빌라와의 3-0 패배 이후 맥메네미가 팀 전체를 속임수로 몰았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에 키건은 매우 이의를 제기했다. 키건은 '세인츠'의 다음 프리시즌 투어에 합류했지만, 이미 이적을 결심한 상태였다. 1982–83 시즌이 시작되기 며칠 전, 그는 10만 파운드의 이적료로 뉴캐슬 유나이티드와 계약했다.[27]

2. 5. 뉴캐슬 유나이티드

케빈 키건은 1982년 당시 2부 리그 소속이었던 뉴캐슬 유나이티드로 이적하여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보냈다.[146] 뉴캐슬에서 그는 팬들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얻었으며, 그의 입단을 발표하는 기자 회견은 고스포스 파크 호텔에서 열렸다. 2부 리그 팀에 두 번의 발롱도르 수상자를 영입하자, 지역 신문의 헤드라인은 "그가 왔다!"였다.

키건은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휴이 갤러처재키 밀번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뉴캐슬에서 뛰는 것을 꿈꿨고, 뉴캐슬 입단은 고향에 온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으며, 데뷔전에서 퀸즈 파크 레인저스를 상대로 첫 골을 넣은 후 군중 속으로 뛰어드는 등 팬들과 하나가 되려는 모습을 보였다.

키건은 아서 콕스 감독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며 팀의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 콕스는 키건에게 선수에 대한 의견을 묻기도 했으며, 키건은 콕스 감독의 유머 감각과 훈련 방식을 존경했다. 1983년에는 피터 비어슬리가 팀에 합류했고, 키건은 비어슬리의 뛰어난 기량에 감탄하며 그를 극찬했다.

1984년 2월 14일, 키건은 33번째 생일에 은퇴를 발표했다. 그는 리버풀과의 경기에서 자신의 속도가 예전 같지 않음을 느끼고 은퇴를 결심했으며, 1부 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연장하기 위해 자신의 플레이 스타일을 바꾸고 싶지 않았다고 밝혔다. 키건의 마지막 리그 경기는 브라이튼 & 호브 알비온과의 경기였으며, 그는 이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하며 팀의 3-1 승리를 이끌었다.[28] 뉴캐슬에서의 마지막 출전은 며칠 후 리버풀과의 친선 경기였으며, 키건은 헬리콥터를 타고 경기장을 떠났다.[28][29]

키건은 뉴캐슬에서 2시즌 동안 78경기에 출전하여 48골을 기록했으며, 팀의 1부 리그 승격에 크게 기여했다.[28] 은퇴 후에는 가족과 함께 스페인으로 이주하여 생활했다.[28]

2. 6. 블랙타운 시티

1985년 4월, 키건은 은퇴를 번복하고 호주 내셔널 사커 리그블랙타운 시티에서 게스트 선수로 두 경기를 뛰었다. 첫 경기에서 캔버라 시티에 2-3으로 패했으나 득점을 기록했다.[30]

3. 국가대표 경력

키건은 1972년 11월 15일 웨일스와의 경기에서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데뷔전을 치렀다.[32] 1974년 5월 11일 웨일스와의 경기에서 국가대표팀 첫 골을 기록했다.[33]

1976년 제리 프란시스가 장기 부상으로 쓰러지자 돈 레비 감독으로부터 주장을 맡게 되어 1982년 FIFA 월드컵 이후 국제 경기 은퇴할 때까지 31번 잉글랜드 주장을 맡았다.[34]

UEFA 유로 1980에서 잉글랜드 주장을 맡았으나, 잉글랜드는 이탈리아벨기에에 이어 조 3위로 그룹 스테이지에서 탈락했다.[34]

1974년과 1978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잉글랜드가 탈락하여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지 못하다가, 1982년 FIFA 월드컵에 잉글랜드 대표팀 주장으로 참가했다.[34] 그러나 만성적인 허리 부상으로 인해 조별 리그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고, 스페인과의 2라운드 경기에서 후반 26분에 교체 투입되었으나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지 못했다.[34] 잉글랜드는 0-0 무승부를 기록하며 준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1982-83 시즌 뉴캐슬 유나이티드에서의 성공적인 시작 이후, 새로 임명된 잉글랜드 감독 바비 롭슨이 키건을 첫 번째 스쿼드에 선발하지 않자 많은 논란이 일었다. 키건은 롭슨으로부터 직접 연락을 받지 않고 언론을 통해 이 결정을 알게 되었다.[34] 키건은 롭슨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시했고, 다시는 조국을 위해 뛰지 않았다.

키건은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서 통산 63경기에 출전하여 21골을 기록했다.[125][128]

국가대표팀과 연도별 출전 및 득점[125][128]
국가대표팀연도출전득점
잉글랜드197210
197310
197472
197582
197692
197782
197863
197985
198063
198151
198241
합계6321



케빈 키건의 국제 경기 득점 목록
No.날짜경기장상대점수결과대회
11974년 5월 11일니니안 파크, 카디프2–02–01974년 영국 홈 챔피언십
21974년 6월 5일스타디온 츠르베나 즈베즈다, 베오그라드2–22–2친선 경기
31975년 5월 11일치리온 스타디움, 키프로스1–01–0유로 1976 예선
41975년 9월 3일St. 야콥-파크, 바젤1–02–1친선 경기
51976년 6월 13일헬싱키 올림픽 스타디움, 헬싱키2–14–11978년 월드컵 예선
64–1
71977년 3월 30일웸블리 스타디움, 런던1–05–0
81977년 11월 16일1–02–0
91978년 4월 19일1–11–1친선 경기
101978년 9월 20일파르켄 스타디움, 코펜하겐1–04–3유로 1980 예선
112–0
121979년 2월 7일웸블리 스타디움, 런던1–04–0
131979년 5월 26일3–13–11979년 영국 홈 챔피언십
141979년 6월 6일바실 레프스키 국립 경기장, 소피아1–03–0유로 1980 예선
151979년 6월 13일프라터슈타디온, 1–23–4친선 경기
161979년 9월 12일웸블리 스타디움, 런던1–01–0유로 1980 예선
171980년 2월 6일1–02–0
182–0
191980년 5월 13일3–13–1친선 경기
201981년 6월 6일네프스타디온, 부다페스트3–13–11982년 월드컵 예선
211982년 2월 23일웸블리 스타디움, 런던2–04–01982년 영국 홈 챔피언십


4. 감독 경력

감독으로서 잉글랜드 클럽과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146]

1992-93 시즌에는 당시 디비전 1(현재의 풋볼 리그 챔피언십, 2부 리그에 해당)의 뉴캐슬을 지휘하여 우승, 프리미어 리그 승격을 결정했다.

1995-96 시즌은 블랙번에서 영입한 앨런 시어러를 앞세워 쾌진격하며, 한때 2위에 12포인트 차로 앞서며 독주하는 활약을 보였다(결국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역전당해 2위로 마감했다). 1998-99 시즌은 디비전 2(현재의 풋볼 리그 원, 3부 상당)의 풀럼을 지휘하여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러한 클럽에서의 수완을 인정받아 1999년 2월 글렌 호들의 후임으로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에 취임했다. 이듬해 유로 2000 출전을 이끌어 본선에서도 지휘했지만, 1승 2패로 1차 리그 탈락으로 끝났다. 그리고 10월 7일 웸블리 스타디움 마지막 경기로 열린 독일과의 FIFA 월드컵 예선 (0-1, 디트마어 하만 득점)에서 패배하여 사임했다.

2001-02 시즌에는 다시 클럽팀을 지휘하게 되어, 디비전 1에 있던 맨체스터 시티를 우승으로 이끌어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2008년 1월, 도중 해임된 샘 앨러다이스의 후임으로 1997년 이후 11년 만에 두 번째 뉴캐슬 감독에 취임했다. 그러나, 구단주였던 마이크 애슐리와 대립하여, 불과 8개월 만에 사임하게 되었다.

4. 1. 뉴캐슬 유나이티드 (1기)

1992년 2월 5일, 선수 은퇴 후 약 8년 만에 케빈 키건은 뉴캐슬 유나이티드 감독으로 부임했다.[35] 당시 뉴캐슬은 2부 리그 강등 위기에 놓여 있었으나, 키건의 지도 아래 잔류에 성공했다. 키건은 부임 직후 훈련 시설을 정비하고, 브라이언 킬클라인을 영입하여 팀의 리더로 삼는 등 팀을 재정비했다.[35]

1992-93 시즌 뉴캐슬은 2부 리그에서 11연승을 기록하는 등 압도적인 성적으로 우승하며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했다.[35] 이 과정에서 리버풀에서 배리 베니슨을, 포츠머스에서 존 베레스포드를 영입하여 수비를 강화했고, 브리스톨 시티에서 앤디 콜을, 찰턴 애슬레틱에서 롭 리를 영입하여 공격과 미드필드를 보강했다.[35]

1993-94 시즌 뉴캐슬은 프리미어리그에서 3위를 차지하며 돌풍을 일으켰고, 1970년대 이후 처음으로 UEFA컵 진출권을 획득했다.[35] 앤디 콜은 40경기에서 34골을 넣어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에 올랐고, 모든 대회를 통틀어 총 41골을 기록하며 클럽 기록을 세웠다.[35] 키건은 스위스 수비수 마크 호티거, 벨기에 수비형 미드필더 필리페 알베르, 노리치 시티의 윙어 루엘 폭스를 영입하며 팀을 더욱 강화했다.

1994-95 시즌에는 앤디 콜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하며 공격력이 약화되어 6위에 머물렀다. 1995년 여름, 키건은 레딩 골키퍼 샤카 히슬롭, 파리 생제르맹다비드 지놀라, 퀸즈 파크 레인저스의 레스 퍼디난드, 윔블던 수비수 워렌 바턴을 영입했다.[35]

1995-96 시즌 뉴캐슬은 블랙번에서 앨런 시어러를 영입하며 공격력을 강화했다. 한때 리그 1위를 질주했으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밀려 준우승에 머물렀다.[40] 특히 시즌 막판 리버풀과의 경기에서 3-4로 패배한 경기는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명경기로 회자된다.[36] 이 경기에서 키건은 알렉스 퍼거슨 감독에게 "우리가 그들을 이기면 좋겠어! 정말 좋겠어!"라는 유명한 발언을 남겼다.[37][38]

1997년 1월 8일, 키건은 성적 부진과 구단과의 불화로 뉴캐슬 감독직에서 사임했다.[41] 뉴캐슬 서포터들은 그를 "킹 켈"이라 부르며 존경했다.[146]

4. 2. 풀럼

케빈 키건은 1997년 9월 25일, 당시 2부 리그 소속이었던 풀럼의 최고 운영 책임자(COO)로 축구계에 복귀했으며, 레이 윌킨스가 수석 코치를 맡았다.[146] 풀럼은 모하메드 알 파예드가 구단을 인수한 지 몇 달 후에 키건에게 선수 영입에 1,000만 파운드를 지원했다.[146] 이는 1968년 이후 최상위 리그에 속하지 못했고, 1986년 이후 2부 리그에서 뛰지 못했던 크레이븐 코티지 클럽에 프리미어 리그 축구를 제공하기 위한 4,000만 파운드 규모의 시도의 첫 번째 단계였다.

키건은 1998-99 시즌에 2부 리그 우승과 1부 리그 승격을 확정했다.[146] 1999년 2월 글렌 호들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직에 전념하기 위해 시즌이 끝날 때 풀럼을 떠났다.[146]

4. 3. 잉글랜드 대표팀

1999년 2월, 케빈 키건은 글렌 호들의 후임으로 잉글랜드 감독에 선임되었다.[45][46][47] 잉글랜드는 UEFA 유로 2000 예선에서 부진을 겪었으나,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3-1로 승리하며[48] 본선 진출의 희망을 이어갔다. 이후 스웨덴, 불가리아와 무승부를 기록하고, 폴란드와의 재경기에서 승점을 잃으며 위기에 몰렸지만, 폴란드가 스웨덴에 패하면서 조 2위로 스코틀랜드와의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잉글랜드는 폴 스콜스의 활약으로 1차전에서 2-0으로 승리하고,[49] 2차전에서 1-0으로 패했지만,[50] 합계 2-1로 유로 2000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49][50]

케빈 키건, 잉글랜드 감독 시절, 뉴캐슬 유나이티드 팬과 함께, 몰타에서


유로 2000 본선에서 잉글랜드는 포르투갈에게 2-0으로 앞서다가 3-2로 역전패하고,[51] 독일을 상대로 1966년 월드컵 결승 이후 첫 승리를 거두며 1-0으로 이겼지만,[51] 루마니아에게 2-1로 앞서다가 3-2로 역전패하며 1승 2패로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52]

2000년 10월 7일, 잉글랜드는 2002 FIFA 월드컵 예선에서 독일에게 패한 후,[55] 키건은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직에서 사임했다.[53][54] 이 경기는 재건축 전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마지막 경기였다.[55] 키건의 잉글랜드 감독 재임 기간 승률은 38.9%로, 역대 잉글랜드 정식 감독 중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55]

4. 4. 맨체스터 시티

케빈 키건은 2001년 5월 조 로일의 후임으로 맨체스터 시티 감독에 부임하며 클럽팀 감독으로 복귀했다.[57] 그는 스튜어트 피어스, 에얄 베르코비치, 알리 베나르비아 등 경험 많은 선수들을 영입했고, 2001-02 시즌 맨체스터 시티를 1부 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프리미어리그 승격을 달성했다. 키건은 프리미어 리그 시대에 두 개의 다른 클럽에서 1부 리그 타이틀을 획득한 최초의 감독이 되었다.[57]

2002-03 시즌에는 니콜라 아넬카, 피터 슈마이켈, 마르크-앙투안 포에를 영입하며 팀을 강화했다.[58][59] 안필드에서 리버풀을 꺾고 맨체스터 더비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4점을 획득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60][61][62] 첼시 원정과 아스널과의 홈 경기에서 각각 5골을 내주는 등 엇갈린 결과를 보였다.[63][64] 결국 리그 9위를 기록하며 프리미어 리그 잔류를 확정했고, UEFA 페어 플레이 랭킹을 통해 UEFA컵 진출권도 획득했다.[57][65]

2003-04 시즌에는 시티 오브 맨체스터 스타디움에서 첫 시즌을 맞아 스티브 맥마나만, 폴 보스벨트, 데이비드 시먼, 미하엘 타르나트를 영입했다.[66] 시즌 초반에는 리그 5위에 오르는 등 좋은 출발을 보였으나,[67] 그로클린과의 UEFA컵 2라운드 홈 경기에서 무승부를 기록하며 탈락한 이후 부진에 빠졌다.[68] 시티는 2월 21일까지 리그에서 승리하지 못했고,[69] 리그 16위로 시즌을 마감했다.[70] 그러나 FA컵에서는 토트넘 홋스퍼를 상대로 전반전에 3-0으로 뒤지고 조이 바튼이 퇴장당한 상황에서도 4-3으로 역전승을 거두는 주목할 만한 경기를 펼치기도 했다.[71]

2004-05 시즌은 더 나은 모습을 보였지만, 키건은 시즌 종료 후 축구계를 은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2005년 3월 10일 감독직에서 물러났다.[57] 그의 후임인 스튜어트 피어스 감독 하에 시티는 8위로 시즌을 마쳤고, 로비 파울러미들즈브러와의 경기에서 추가 시간 페널티킥을 놓치면서 UEFA컵 진출에는 실패했다.[72] 키건이 감독을 맡고 있던 시즌 초, 시티는 첼시를 1-0으로 꺾었는데, 이는 첼시가 그 시즌 프리미어 리그에서 기록한 유일한 패배였다.[73]

4. 5. 뉴캐슬 유나이티드 (2기)

2008년 1월, 샘 앨러다이스 감독이 해고된 후,[76] 키건은 뉴캐슬 유나이티드 감독으로 복귀했다.[77] 뉴캐슬 팬들은 마이크 애슐리 구단주와 크리스 모트 회장과 함께 스토크 시티와의 FA컵 3라운드 재경기를 보기 위해 도착한 키건 감독을 환영했다.[77] 복귀 후 첫 경기인 볼턴 원더러스와의 경기에서[78] 마이클 오언에게 주장직을 맡겼다.[79]

키건의 복귀 이후 뉴캐슬은 초반 8경기에서 승리하지 못하며 부진했다.[81] 그러나 3월 22일, 풀럼을 2-0으로 꺾고 첫 승을 거두었다.[81] 이후 토트넘 홋스퍼선덜랜드를 상대로 승리하는 등,[82][83] 마이클 오언, 오바페미 마틴스, 마크 비두카로 구성된 공격진의 활약으로 팀을 강등 위기에서 구해냈다.[84] 뉴캐슬은 7경기 무패 행진을 달리다 첼시에 패하며 12위로 시즌을 마감했다.[84]

2008-09 시즌을 앞두고 호나스 구티에레스,[85] 파브리시오 콜로치니 등을 영입하며[86][87] 팀 재건을 시도했다. 시즌 첫 경기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원정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하고,[88] 다음 경기에서 볼턴을 1-0으로 이겼으며,[89] 코벤트리 시티와의 리그 컵 2라운드 경기에서 3-2로 승리했다.[90]

그러나 2007-08 시즌이 끝나갈 무렵부터 구단 이사진과 키건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고,[91] 키건은 이사진이 프리미어 리그 상위 4위 안에 진입하는 데 필요한 재정적 지원을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91] 2008년 9월, 이적 시장 마감 직후 키건은 구단주 마이크 애슐리와의 불화로 인해 감독직에서 사임했다.[8] 키건은 "감독은 관리할 권리를 가져야 하며, 구단은 감독이 원하지 않는 선수를 어떤 감독에게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8]

키건의 사임 이후 뉴캐슬은 선수 영입 문제로 법적 분쟁을 겪었다. 키건은 부당 해고를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고,[101] 2009년 10월 재판부는 키건의 손을 들어주었다. 재판부는 뉴캐슬이 키건의 의사에 반하여 나초 곤잘레스의 임대를 강요한 것을 해고(constructive dismissal)로 인정했다.[104] 키건은 200만 파운드의 보상금을 받았다.[107]

5. 플레이 스타일

6. 감독 스타일

6. 1. 브루트 광고 논란

키건은 권투 선수 헨리 쿠퍼와 함께 남성 화장품 브랜드 브루트 애프터셰이브 광고에 출연했다.[114] 이 광고는 인종차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6. 2. 뉴캐슬과의 법적 분쟁

2008년 12월, 마이크 애슐리가 뉴캐슬 매각을 철회하기로 결정한 후, 케빈 키건의 사임과 관련하여 법적 분쟁이 발생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키건은 부당 해고를 주장했고, 애슐리는 그의 대외적 이미지 훼손을 주장했다.[101] 2009년 9월, 키건이 충격적인 사임에 대한 보상으로 1,000만 파운드를 청구하기 위해 전 멤버를 포함한 애슐리와 뉴캐슬 이사진과 프리미어 리그 중재 심리에서 만났다는 보도가 있었다.[102] 양측은 중재를 공개적으로 진행하는 것에 동의했다.[103]

키건과 구단 간의 분쟁은 2009년 10월에 해결되었다. 재판부는 뉴캐슬이 키건의 의사에 반하여 미드필더 나초 곤잘레스의 임대를 강요함으로써 그를 해고한 것에 동의하며 키건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조치는 애스턴 빌라 FC로 이적한 제임스 밀너를 대체하기 위해 이루어졌으며, FC 바이에른 뮌헨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에 대한 제안이 거부된 후에 이루어졌다.[104] 데니스 와이즈가 스페인 공격수 시스코를 영입한 것은 심리에서 언급되지 않았지만, 키건은 이것 또한 그의 사임의 핵심 요인이었다고 말했다.[105]

판결은 7가지 쟁점을 기반으로 했다.[106] 패널은 키건이 선수 이적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믿도록 유도되었으며, 그의 계약서나 구두로도 그가 그렇지 않다는 점, 또는 그의 역할이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고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전달받지 못했다고 선언했다.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프리미어 리그 감독의 역할을 고려할 때, 패널은 이것이 요인이 아니라고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다고 동의했다. 구단의 곤잘레스 영입은 그들이 그의 고용 계약을 위반했음을 의미하며, 이는 해고에 해당했다. 곤잘레스가 결정의 주요 쟁점이었지만, 키건에 대한 구단의 부당한 대우, 즉 그들이 제안한 조건에 동의하지 않으면 그를 해고할 수 있다고 주장한 점, 그리고 9월 1일에 사임하는 대신 9월 4일까지 구단에 남아 타협을 허용한 그의 결정이 키건에게 유리한 판결로 이어졌다. 키건은 그의 계약에 명시된 해고 조항에 따라 200만 파운드(이자 포함)를 받았다. 표준 계약 해고 조항이 해고를 다루고 있다는 이유로 더 많은 청구는 거부되었다. 키건은 이후 그의 청구 목적이 그의 명성을 회복하는 것이었고 결과에 매우 만족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107]

재판에서 승소하기 위해 구단은 언론과 지지자들을 오도한 사실을 인정했다. 데니스 와이즈와 데릭 람비아스를 포함한 몇몇 핵심 고위 직원들은 공개적으로 키건이 "최종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재판부에 이것이 사실이 아니었고 그들의 주장은 단지 "홍보"였다고 주장했다. 그 후 와이즈가 "유튜브"에서 그를 본 후 키건에게 곤잘레스를 영입하라고 요청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0월 21일, 같은 패널의 후속 회의에서 구단이 재판으로 인해 키건이 지출한 모든 법적 비용 및 관련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그들은 구단의 "주요 책임 문제에 대한 변호가 우리 보기에는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견해를 바탕으로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다.[108]

키건은 심리 후에도 여전히 최고 수준의 축구를 관리하고 싶어하며, 구단으로 복귀하는 것을 고려할 것이지만, 지지자들이 그의 마지막 재임 기간에 지쳐서 그가 그러지 않기를 바랄 것이라고 느꼈다고 말했다.[109] 2013년 6월, 키건은 애슐리가 구단을 떠나야만 복귀를 고려할 것이라고 말했다.[110] 수년에 걸쳐 키건은 애슐리를 계속 비판하며 그가 지지자들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111] 뉴캐슬 유나이티드가 공적 투자 기금에 매각된 후, 키건은 크램링턴에서 열린 행사에서 공개적으로 연설하며 애슐리의 퇴장을 기뻐하고 새로운 소유주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축구 클럽과 재정적으로 경쟁할 수 있는 능력에 흥분한다고 말했다.[112]

7. 수상 경력

7. 1. 선수

케빈 키건은 선수 시절 리버풀, 함부르크 등에서 활약하며 많은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리버풀에서 풋볼 리그 1부 3회(1972-73, 1975-76, 1976-77), FA컵 1회(1973-74), FA 채리티 실드 2회(1974, 1976), 유러피언 컵 1회(1976-77), UEFA컵 2회(1972-73, 1975-76) 우승을 차지했다.[13] 함부르크에서는 분데스리가 우승 1회(1978-79)를 기록했다.[13] 1979-80 유러피언컵에서는 준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서 잉글랜드 대표팀 소속으로 4회 (1973, 1975, 1979, 1982)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개인 수상 경력으로는 발롱도르 2회(1978, 1979),[21] 옹즈도르 2회(1977, 1979), 옹즈 다르젠토 2회(1976, 1980) 수상이 있다.[137] PFA 올해의 선수(1981-82), FWA 올해의 축구 선수(1975-76)에 선정되었으며, 키커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 3회(1977–78, 1978–79, 1979–80),[131][132][133] 대영 제국 훈장 4등급(OBE)을 수훈했다.[147] 2002년에는 잉글리시 풋볼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134] 리버풀의 ''콮을 흔든 100명의 선수들'' 목록에서 8위에 선정되었다.[135] FIFA 100에도 선정되었다.

7. 2. 감독

케빈 키건은 뉴캐슬 유나이티드, 풀럼 FC, 맨체스터 시티 FC에서 감독직을 수행하며 여러 차례 우승을 경험했다.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이끌고 1992-93 풋볼 리그 1부 리그에서 우승했으며, 풀럼 FC에서는 1998-99 풋볼 리그 2부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맨체스터 시티 FC 감독 시절에는 2001-02 풋볼 리그 1부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142] 또한,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감독에 5회 선정되었다.[142] (1993년 11월, 1994년 8월, 1995년 2월, 1995년 8월, 1995년 9월)[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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